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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저널 그날- 신돈

안녕하세요 양리입니다.

 

 

이번주 일요일에는 약 2주만에 역사저널 그날 방송을 하였습니다. 고려시대 신돈에 대해 이야기를 다뤄놨는데,아래와 같이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공민왕은 정치행색은 노국대장공주가 살았을때와 죽었을때가 틀리다고 합니다. 공주가 죽고 신돈을 만나 신돈에게 더욱 의지하는데, 얼마나 사랑했는지 밥먹을때에도 노국대장공주 초상화를 그려놓고 먹을 정도 였다고 합니다.

 

 

 

 

 

 

 

 

 

 

노비에 자식이이고 승려였던 신돈은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단숨에 발탁되는데, 왕의 사부로서 국정에 바로 참여하게 됩니다. 당시 섭리라는 글자가 들어가 관직을 받게 되는데, 이 관직은 고려시대에 딱 두사람이 받게되는데, 한명은 신돈 또한명은 이성계라고 합니다. 그만큼 파격적인 승진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신돈의 이미지는 개혁과 요승이라는 두가지 이미지가 떠올리게 되는데, 현재는 요승이라는 이미지는 없어지고 개혁이라는 단어로 국사교과서에 나왔다고 합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역사적인 해석은 달라질 수 있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신돈의 등장은 한마디로 파격적인 개혁을 시행하는데, 1366년 전민변종도감설치를 하는데 이는 권세가들이 점유하고 있던 불법 적인 노비를 양인으로 풀어주고 불법 점유한 토지의 원상회복을 하는정책을 펼쳐 상대적으로 권세가들에 세력은 약해지고, 국가의 재정이 높아진 신돈과 공민왕의 합작품에 성공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파격적인 개혁시도는 권문세족들과 갈등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데, 신돈은 공민왕에게 아뢰길 당대최고의 유학자 이제현의 문생들에게 "나라를 뒤집는 도적과 같다"라는 표현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에 격분한 이제현은 공민왕에게 아뢰길, "신돈의 골상이 옛날의 흉악한 자들과 같으니 가까이 하지 말라고 충고한 일이 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신돈은 당시 개혁을 단행하며, 많은 권문세족과 대립했음을 짐작해하는 대목입니다.

 

 

 

 

 

 

 

 

신돈의 등장으로 공민왕은 마치 신돈에게 모든걸 위임한것 처럼 보이지만, 신돈이 제거한 정치 세력은 대부분이 공민왕의 정적이거나 반대파였다고 합니다. 신돈이 행태에 대해  동사강목에 나오는 자료에 의하면 "권력을 마음대로 하며 은혜와 원수를 반드시 갚아 세가 대족의 거의 다 주살당하여 사람들이 그를 호랑이나 이리 보듯이 하였다."

 

 

 

 

 

 

 

 

 

공민왕 19년 노국대장신전 조성사업에 대한 불만은 아무도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신돈은 정치세력이 강력해져 백성에 입장에서 생각한 신돈이 결국 반대하는 입장을 내놓게 됩니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에 대한 사랑에는 최측근인 신돈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뒤로 서로 사이가 멀어지다가 결국 신돈도 공민왕이 자기를 의심하는 것을 눈치채게 됩니다. 이 후 신돈은 공민왕을 제거하려고 하지만 발각이 되 결국 수원으로 유배를 가게 되고 바로 참수당하게 됩니다.

 

 

 

해당 사진들은 본문에 이해를 돕기 위한 용도이며 모든권리는 해당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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