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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저널 그날 - 기황후

안녕하세요 양리입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기황후와 공민왕에대해 방송을 내보냈습니다. 아래와 같이 파트별로 확

 

인하시길 바랍니다.

 

 

 

 

 

공민왕은 볼모로 원의 연경에 간것은 12살이였습니다. 이후 조카인 충정왕이 폐위되어 1351년

 

국할때까지 약 10년을 살았으며, 그 사이 두차례 왕위계승에서 실패하는 아픔을 겪다가, 결

 

왕이 되는데 이때 많은 도음을 준 사람은 고려의 공녀 출신으로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였

 

니다.

 

 

 

 

 

 

 

 기황후가 공민왕을 지지한 이유는 두가지로 볼 수 가 있습니다. 공민왕이전에 충목왕,충정왕이

 

였는데 둘다 어린왕이 였습니다. 어린왕이 집권을 하면 외척들이 기세가 등등하게 마련인데,

 

기씨일족이랑 대립관계에 있어서 기황후가 기존 어린왕들을 폐위를 시킨이유가 첫번째이고 두

 

번째는 기황후에 남편 원나라 순제는 왜구문제로 골머리를 썩었다고 합니다. 이 전 어린왕들은

 

왜구문제에대해 등한시한 부분이 있어 성년이었던 공민왕을 방패막이가 되어 줄 것이라고 생

 

각을 했던것 같습니다.

 

 

 

 

 

기세등등한 기씨일족에 조일신은 기씨일족을 처단하려고 1352년 반란을 일으킵니다. 기씨일족

 

과 친원세력을 주살하려고 하지만 기원만이 살해되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을 쳐 화를 면합니다.

 

이 일로 조일신은 공민왕에게 기씨일족을 일망타진하자고 요청을 하지만 그 사이 원나라에까

 

지 이이야기가 퍼져 공민왕은 조일신을 반란죄로 주살하게 됩니다. 일명 '조일신의 난은'7일만

 

에 평정이 됩니다. 조일신의 난은 두가지로 추측을 할 수 가 있습니다. 조일신이 독단적으로 행

 

동한거와 공민왕이 조일신에게 명을 내렸지만 기씨일족이 생각보다 강했던 상황이었던 두가지

 

중에 후자인 공민왕이 조일신에게 명을 내렸던 후자쪽이 더 가깝다는게 추측입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쇠퇴를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1356년 5월 18일 고려 내 기황후 세력제

 

거, 정동행중서성 이문소 폐지, 쌍성총관부 수복을 위해 군대 출정을 모두 하루만에 해냅니다.

 

공민왕이 하루만에 이루어 냈다는것은 얼마나 그동안 주도면밀하게 계획했다는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쌍성총관부(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 이북지역-원이 고려을 다스리기 위한

 

몽골의 지방관청)를 수복을 위해서 미리 이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고려인을 포섭합니다. 그 사

 

람이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입니다. 쌍성총관부를 공격했을때도 성안에서 이자춘은 성

 

문을 여는데 큰힘을 보탭니다. 이때부터 그 공을 인정받아 고려정계에 진출을 하게 됩니다.

 

 

 

 

 

 

 

1363년 공민왕이 흥왕사에서 머물고 있을때 누군가에 의해 암살시도가 이루워집니다.이때 노

 

국공주가 온몸을 내던져 막아냅니다. 배후에는 기황후가 있었던거로 보여지며 그사이에 기씨

 

일족이 숙청당한데  보복성으로 보여집니다.

 

 

 

해당 사진들은 본문에 이해를 돕기 위한 용도이며 모든권리는 해당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이전포스팅도 같이 올립니다.

2016/10/18 - [역사] - 역사저널 그날 - 충선왕

2016/10/11 - [역사] - 역사저널 그날 -충렬왕과 몽골공주가 혼인하다.

2016/10/05 - [역사] - 역사저널 그날 - 삼별초

2016/09/27 - [역사] - 역사저널 그날-임진왜란

2016/09/21 - [역사] - 역사저널 그날 -거북선

2016/09/08 - [역사] - 역사저널 그날 - 김윤후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