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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사기 - 부여

안녕하세요 양리입니다.

 

 

이번 한국사기에서는 부여에 대해 방송을 했습니다. 고대국가이다 보니 자료가 풍성하지는 않지만 삼국지와 삼국사기에 이야기를 인용해 방송을 하였습니다.

 

 

 

 

 

 

 

 

 

중국에 길림성 북부에 도시이름이 부여라고 지명이 되어 있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동명왕상이라는 동상이 크게 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부여가 우리나라 역사라는게 자부심이 크게 생깁니다. 얼마전에 중국에서 부여유물이 발견이 되었는데, 거기에 인골을 조사한 결과 중국인과 다르다는 연구결과 나왔습니다. 또한 부여는 고조선때부터 내려온 상투와 흰색도포를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부여는 동북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읍루,옥저를 복속시키고 고구려 이하 주변 국가들에도 강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강력한 국가였습니다. 부여법 또한 강력했는데, 도둑질하면 12배로 갚게하고, 사람을 죽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가족은 노비로 삼았습니다. 남녀가 간음을 하면 모두 죽였습니다. 

 

 

 

 

 

 

 

 

 

부여가 건재하고 있을 때 고구려도 건국이 되었는데, 고구려의 초기 성은 오녀상성입니다. 삼면의 깍아지른 절벽이고 성축성또한 견고해서 난공불락이였다고 합니다. 고구려를 세운 사람은 주몽입니다. 조금 특이한게 고구려신화와 부여의 신화와 똑같습니다. 이는 부여가 고구려의 조상의 나라라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또한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는데, 광개토태왕비에 그 정답이 있습니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부여에서 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백제를 세운 왕은 온조왕입니다. 온조왕은 소서노의 두번째 아들인데, 바로 주몽에 아내입니다. 주몽의 아내 소서노는 주몽을 왕으로 만들어 주는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하지만 주몽의 본부인이 나타나면서 본부인의 아들 유리가 세자책봉이 되자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 두아들과 남하해 백제를 세웁니다. 온조는 초기에는 부여의 동명왕 제사도 지냈으며, 남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남부여라고 칭했다고 합니다.

 

 

 

 

 

 

 

 

 

신라는 삼국중에 제일먼저 국가의 기틀을 잡았는데, 고조선이 멸망을 했을때 유민들은 신라 경주에 많이 정착을 했다고 합니다. 고존선의 멸망하면서 유민이 산골짜기에 나누어 살명서 여섯 촌락을 이루었습니다. 이 때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등장을 하는데, 여섯 촌장들이 신라의 왕으로 추대합니다.

 

 

 

 

 

 

 

 

가야에서 대성동 금관가야 고분군에서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높은 신분의 한명과 세명으로 추정되는 여자인골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순장이라고 하는데, 부여에서는 많으면 100여명까지 순장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각종 북방기마민족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동복'이라는 것은 북방지방에 것과 동일하다고 합니다.

 

 

 

해당 사진들은 본문에 이해를 돕기 위한 용도이며 모든권리는 해당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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