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양리입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임진왜란시리즈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패널로는 1952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역을 맡은 김응수씨도 나오셨습니다.
간단하게 연기도 펼치는데 정말 소름돋았습니다.
이제 역사저널 그날 리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평양성은 철옹성 이었다고 합니다.
수나라 당나라때도 뚫지 못했던 난공불락였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에서 선조는 도성 한양을 버린이후 평양성 마저 버린 이유에 대해 삼도근왕군 패배가 제일 큰 요인이 였다고 합니다.
한양을 함락당한 후 충청,전라,경상에서 한양을 수복하겠다고 올라오지만 용인에서 대패를 했다고 합니다.
선조는 큰 희망을 걸었던 삼도근왕군에 패배로 기대감을 잃고 북진을 하여 명나라 구원군에 더의지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명나라에서는 원군 요청 2달만에 파병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조선향도론(조선이 길을 안내해 일본이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설)과 한양이 이렇게 빨리 함락이 된 것은 조선과 일본이 같이 명나라를 공격할려는 의구심때문에 빨리 파병을 못했다고 합니다.
명나라에서는 조선에 왕이 정말 의주까지 와있는지 사찰단까지 파견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당시 조선향도론의 의견이 팽배했던것 같습니다.
평양성 탈환을 하면서 비밀 병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명나라 병기중 으뜸이였던 "화포"였다고 합니다.
물론 조선에서도 화포가 있었습니다.
지자총통이라고 있었는데 무겁고 2인1조로 해야되서 대부분 성의 수성전이나 해상전에서만 사용했다고 합니다.
당시 활용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거에 반해 명나라 화포부대(남병)는 좀더 이동이 자유롭고 부대가 따로 잘 훈련되어서 평양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조명 연합군은 평양을 탈환한 뒤 전세가 역전됐습니다.
일본군들은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 개성쪽으로 해서 한양으로 제2군 가토 기요마사는 함흥에서 한양으로 퇴각을 하게 됐습니다.
일본군이 평양에서 더 북진을 못했던거는 이순신때문이 였다고 합니다.
해상에서 보급로가 차단되니까 쉽게 육상군들도 북진을 못해 아래쪽으로 퇴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명 연합군 입장에서는 이순신장군이 해상 전투에 이겨 사기가 떨어져 있는 일본군을 계속 압박할 수 있었던 같습니다.
명나라의 참전은 조선에게 '약 주고 병 주고'였다고 합니다.
대명의리론이라고 해서 조선은 분명 명에게 고마운 부분도 있었으나 조선은 명에게 너무 기대어 임진왜란 끝난 후에도 명 태조,신종,의종까지 제사를 지내줬다라는 자료가 있습니다.
명분만 강조해 현실감각이 무뎌지는 역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임진왜란 사태가 나면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자국의 힘을 키우지 않으면 수모를 당할 수 있는 상황을 역사적으로도 교훈을 주게 됩니다.
일본의 패전의 이유는 이순신을 들어보지 못한 이유였습니다.
조선과 일본은 교류가 없었던게 144년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도 일본을 모르고 역으로 일본도 조선을 몰랐던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조선이 결정적으로 승리하게 된것은 한산도 대첩이였습니다.
일본의 보급로를 막아 고니시 유키나가가 고립되어 결정적 패전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은 두명이였다고 합니다.
정말 우연찮게 이순신장군 휘하에 이순신이 실제로 있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다른 사람이고 의도하지 않게 일본을 교란시켰을 거라고 추측이 됩니다.
2016/09/21 - [역사] - 역사저널 그날 -거북선
해당 사진들은 본문에 이해를 돕기 위한 용도이며 모든권리는 해당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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