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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저널 그날 - 삼별초

안녕하세요 양리입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고려시대 삼별초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삼별초는 역사적으로 어려운 해석을 요구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어떤 내용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삼별초란?

 

삼별초에서 빠질 수 없는 이야기는 최씨 정권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최우가 치안유지를 위해 야별초에서 비롯된 것으로 벌초란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입니다.

삼별초는 도적을 잡는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었습니다.

그 도적은 백성이라는 의미로 최씨집안은 백성을 외면한 채 사치생활을 하고 더 많은 세금을 거둬 백성들의 원망을 샀습니다.

몽골과 싸우자는 최씨정권의 최의가 죽자 고려정부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전쟁을 끝냈습니다. 하지만 삼별초는 최씨집안의 사병이였기 때문에 개경으로 돌아가면 백성들의 원망과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워 질수 있었기때문에 강화도에서 배중손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삼별초 봉기에 대한 백성들의 선택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봉기를 함에 따라 대몽항쟁을 적극 지지하면서 강화도로 유입된 백성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삼별초에서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최씨집안의 사병이였던 삼별초에 대한 적대감도 이유였던것 같습니다.

 

 

 

 

 

 

 

 

 

 

 

 

 

 

 

삼별초의 천도

 

삼별초는 거병을 하고 약 2틀뒤에 1000여척의 배와 함께 남쪽으로 떠납니다.

1000척의 배로 이동 하였는데 1척당 약 35명의 군사들이 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화물도 많이 싫었기 때문에 반 정도만 탈 수 있어 약 만오천명정도가 배의 탓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2틀만에 출발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해도재천(무신정권이 대몽항쟁을 계속하기 위해 강화도에서 다른섬으로 수도를 옮기려 하는 계획)이라 하여 약 10년동안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합니다.

 

 

 

 

 

 

 

삼별초,일본에 외교 문서를 보내다.

 

진도 정부가 일본에 외교 문서를 보냅니다.

현재 자료로는 일본에 남아 있는 고려첩장불심조조로 외교문서로 보냈다는 증거가 남아 있는데,진도 정부가 보낸 외교문서는 남아 있지가 않습니다.

일본측 자료로 유추해본다면 진도 정부는 대몽항쟁에 일본에게 연합전선을 구축했을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또 다른 증거는 길속기라는 일본귀족이 남긴 일기에도 

"몽골이 일본을 공격하려 할것이다 군사와 식량을 보내달라"라는 기록이 있어서 연합전선을 구축하자는 이야기에 무게가 더 실립니다.

하지만 기록은 없지만 일본은 거절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의 막부는 외교보다는 군사적행동을 바로 취한다는 입장이였다고 합니다.

 

 

 

삼별초는 몽골과고려조정의 연합군에게 진도가 함락되고 배중손이 죽자 김통정의 지휘 아래 제주도로 항쟁했다고 합니다.

고려와 몽골 연합군은 제주도까지와 삼별초를 진압했습니다.

김통정은 한라산에서 부하 70명과 함께 목숨을 끊었고 이렇게 삼별초의 난은 4년 만에 집압되었습니다.

 

 

해당 사진들은 본문에 이해를 돕기 위한 용도이며 모든권리는 해당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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